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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정치 체제와 선교 역사의 관계성 연구 biit 200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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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정치 체제와 선교 역사의 관계성 연구

김 정 호 선교사

Ⅰ. 들어가는 말

캄보디아는 지난 역사 속에 많은 정치체제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정치체제의 변화 속에 선교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캄보디아는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앙코르 제국의 찬란한 시대가 있었다. 최고의 장관을 자랑하는 앙코르 왓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세워진 힌두교 사원이다. 그리고 앙코르 톰 사원은 자야르바르만 7세가 불교에 심취해 세운 불교 사원이다. 그러다가 14세기 이후 캄보디아는 불교의 나라가 되어 지금까지 소승불교를 믿는 나라이다.

그리고 15세기이후에는 태국과 베트남의 침공과 간섭을 받아 오다가, 1863년에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53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고, 1970년까지 시아누크왕이 왕위를 버리고 직접 총리로 통치하는 불교적 사회주의(Buddhist Socialism)가 있었고, 1970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공산화하여 통치한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시기에 많은 학살이 있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는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를 몰아내고 헹삼린을 국가 주석으로 세우고 캄보디아를 통치했는데, 이 시기를 캄보디아 인민 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이라 부른다.

1991년부터 U.N이 중재하여 연립내각을 만들게 하여 민주적인 선거를 준비하였다. 1993년에 총선을 하여 훈신펙 당 라나리드가 제일 총리가 되었고,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센이 제 이 총리가 되어 연합정부를 구성하여 통치하였다.

1998년 총선에서 캄보디아 인민당이 승리하여 훈센 총리가 통치하였고, 1998년 12월에 폴폿의 사망과 함께 크메르 루주군이 항복하여, 공산주의가 사라졌다. 이 시기를 안정기로 향하는 과도기적인 시대라 필자는 본다. 이어 새 밀리엄 시대인 2000년부터 이 나라가 안정 속에 들어가 성장을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데 특히 이 안정과 성장 시대에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이 나라 선교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나라의 정치체제의 변화 속에 선교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살펴보며 이 시대를 사는 한 선교사로서 좀 더 바른 선교를 하기를 기대하며 글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Ⅱ. 캄보디아의 각 시기의 정치 체제와 선교 역사의 관계

1. 초기 카톨릭 선교 시기(1555년부터 1863년까지)

처음으로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선교 여행을 온 시기는 1517년으로 몇 주 동안 머물렀다. 맨 처음 로마 카톨릭 선교사로서 16세기 중엽에 도착한 사람은 Father F.Pinto 였다. 그리고 1555년 카톨릭 선교사 Gaspar de Cruz가 캄보디아의 롱벡 시에 와서 국왕 밭앙찬 1세(Bat Ang Chan first)에 의해 초대되어 시작되었다. 그 때 왕가의 한 명이 크리스챤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왕가는 크리스챤들과 몇 번의 만남이 있었고 1570년에 카톨릭 선교사들은 캄보디아에서 확고한 선교회를 설립했다.

카톨릭이 캄보디아에서 약 4세기 동안 선교한 결과 약 3만명의 신자을 가지게 되었는데, 대부분은 베트남 종족이었다. 로마 카톨릭은 캄보디아인들에게 보다는 베트남인들에게 더욱 관심을 얻었다. 현재 캄보디아에서 카톨릭 성당은 거의 보기가 힘들 정도로 매우 소수이다.

2.프랑스 식민 통치와 선교(1863년부터 1953년까지)

캄보디아는 15세기 이후로 태국과 베트남에 의해 잦은 침략을 받았다. 급기야 1776년에 태국과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1861년부터 태국의 심한 간섭을 받아 오던 캄보디아 노로돔 국왕은 1863년 8월에 우동시에서 프랑스 해군 대표단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래서 카톨릭 선교사들은 캄보디아 어디에서든지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식민 통치 시기에 개신교 선교의 출발은 1923년 C&MA(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선교 단체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입국 허락을 받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국왕은 계속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허락을 거절하였고, 프랑스 총독부 역시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프놈펜에 입국 허락을 받기 전에 태국 방콕에 있던 미국 성서공회가 공회의 사역이 캄보디아까지 확장 되도록 청원서를 캄보디아 당국에 올렸으나 거절당했었다. 이로 인해 성서공회는 캄보디아 선교가 열리도록 요청을 성서 공회 소식지에 발간했고,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드디어 1923년 2월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최초의 선교사는 두 가정으로 아더 하몬드 부부(Arthur Hammond)와 데이비드 엘리슨 부부(David Ellison)였다. 아더 하몬드 부부는 프놈펜에 남아서 전적으로 캄보디아어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1925년에 시작하여 1933년에 신약 번역을 완성하고, 약 30년의 노고로 1954년에 신구약 성경이 발간되었다. 데이비드 엘리슨 부부는 프놈펜에서 약 320키로 떨어진 캄보디아의 둘째 도시인 바탐방으로 가서 처음 2년동안 목회자와 전도자들을 키워내기 위해 제자훈련에 힘을 썼고, 1925년에는 선교사의 가정에서 작은 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이 작은 신학교는 향후 50년에 캄보디아 복음 교회의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1928년에 이 신학교는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고, 선교사들은 스파이를 훈려시키는 자들로 고소되며 국외 추방 협박을 받았다.

이들은 사역 초기인 10년 동안은 프랑스 정부와 로마 카톨릭의 많은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그들은 개종자들을 정부에 보고해야 했고 나중에는 선교사의 가정에 개종자들을 둘 수가 없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면 추방된다는 위협도 받았다. 마침내 1932년에 국왕 시소왓 모니봉(Sisowath Monivong)에 의해 "캄보디아인을 개종시키는 일이 금지되는 포고령"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현지 순회 전도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체포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해에 선교사들은 다른 지방으로 떠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핍박과 고난을 의미했다.

1942년에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캄보디아는 일본과 태국의 통치아래 들어가, 태국이 바탐방과 시엠립을 양도받았다. 태국은 1945년에 U.N의 압력으로 철수하였다. 일본은 1941년에 캄보디아에 주둔하다가, 1945년 3월19일에 일본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함과 동시에 프랑스 주둔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식민 통치 관리들을 강제 수용시키며 캄보디아를 접수했다. 이때 캄보디아는 잠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패망함으로 프랑스가 다시 캄보디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1946년에 캄보디아 정부는 기독교에 대해 조금 더 자유를 주었다. 바탐방에 폐쇄되었던 성경 학교는 1949년에 따끄마으 주로 이전되어 다시 시작했다. 성경 학교 학생들은 훈련을 받고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정 교회를 세웠다.

1953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이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는 개신교 선교의 초기 단계로 프랑스 관리들 뿐 아니라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던 시기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선교사들은 고난을 인내하며 복음을 전하며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이것이 캄보디아에 믿음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까지 그 믿음의 역사가 이어 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C&MA의 선교사가 초기에 간 바탐방 지역은 현재 복음화 율이 높은 지역이 되었다. 선교사들과 믿는 자들의 기도와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생각한다.

3. 시아누크의 불교적 사회주의(Buddhist Socialism)와 선교 (1954년부터 1979년 까지)

1953년에 캄보디아 독립은 시아누크의 역할이 컸다. 1941년 18세로 왕으로 등극된 시아누크는 1955년에 왕위를 아버지에게 이양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어 쌍큼당(인민 사회주의 공동체)이라는 정당을 창설했다. 시아누크는 미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중립적 외교를 폈다. 1960년에는 군주제 폐지를 국민 투표에 부쳐 무력적 탄압으로 99%의 찬성을 얻고, 군주제를 버리고 국가 원수가 되었다.

시아누크는 친불교적이고 중립적인 노선에 사회주의로 통치 이념을 갖고 통치했다. 이 시기에 불교는 국교였고 절이 삼천 개, 승려는 이만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아누크는 복음에 적대적이어서, 1960년대에 크리스챤들은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65년에 시아누크는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끊고 모든 미국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했다. 이 시기에 또한 C&MA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캄보디아 복음 교회(Cambodin Evangelical Church)들은 문을 닫도록 정부에 의해 명령을 받았다. 4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를 하지 말 것에 대한 싸인을 거절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1968년에 캄보디아의 교회는 약 40년 동안의 노력의 결과로 약 1000명의 성도를 갖게 되었다. 이 숫자는 인구의 약 0.1% 미만이다.

이 시대는 시아누크의 친 불교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기독교 성장이 느렸다. 정치적 체제나 상황에 따라 기독교 성장이 영향을 받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캄보디아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4. 론놀 공화국 시기(Khmer Republic under Lon nol)와 선교(1970년부터 1975 년까지)

시아누크의 삼촌 시리마틱은 1970년 3월 17일에 론논에게 다음 날 있을 국회에 시아누크 해임안을 서명하라고 권총으로 위협해, 시아누크의 신복이었던 론놀은 눈물을 흘리면서 서명했다. 그 결과로 3월 18일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시아누크를 해임시켰다. 1970년 7월에 시아누크는 국가 원수에서 사임하고 론놀에게 정부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론놀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부정 부패로 인해 국민의 원망을 샀고, 또한 크메르 루주 공산당을 당해 내지 못했다.

론놀 정부는 선교 단체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캄보디아 복음 교회(C.E.C)는 C&MA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돌아오도록 초청하고 그들이 돌아오자 그들의 사역을 도왔다. 이 시기에 월드 비젼의 의료 사역은 불교인 관리들에게도 존경심을 샀다.

1972년에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사들은 프놈펜에 와서 이슬람교도인 짬 족을 향해 선교를 하였다. 1972년에 월드 비젼의 Stanley Mooneyham은 3일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육천 명이 참석해 복음을 들었다. 두 번째 집회에는 1만 명이 참석하여 삼천 명이 결신을 했다.

1973년에 Todd Burke라는 젊은 미국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와서 1975년까지 사역을 했다. 그는 Cambodia Charismatic Christian Mission이라는 단체를 형성해, 신유 집회를 했고, 42명이 세례를 받았고, 마라나타 교회를 프놈펜에 개척했다.

1973년에 O.M.F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왔는데, Andrew way는 청소년 센타를 세워 사역했고, Don Cormack, Andrew Butler, 그리고 Alice compain은 C&MA 선교 단체와 함께 목회자 훈련을 같이 했다.

이런 활발한 사역을 통해 1969년에 활동적인 복음적인 교회가 2개였는데, 1975년에는 31개가 되었다. Gene Hall 선교사회 회장과 캄보디아 복음 교회 협회(C.E.C) 회장인 Reach Yea 현지인 목사는 프놈펜에서 기독교인 숫자는 일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1972년 일 년 동안 삼천 명이 결신을 했는데, 이 숫자는 C&MA 선교 단체가 50년 동안 선교한 것보다 더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여기에 대해 Doreen Tan Gek L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는 1972년은 캄보디아 상황이 크메르 루주군과의 전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자신의 집을 떠나 도시로 몰려 왔는데, 특히 프놈펜시내로 몰려 왔다. 그리고 전쟁과 고난 속에 이들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성도들은 새로운 하나의 연합체가 되었다.

둘째는 정부가 교회에 대해 호의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교회는 정부가 원하는 피난자나 약한 자들을 도왔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봉사가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결신하게 된 동기가 되었고, 정부와의 관계도 호의적이 되게 했다.

셋째는 이전의 정치적 체제가 많은 캄보디아인들에게 평화와 안전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망과 평화를 찾았으며, 성령께서 이들에게 역사하셨다. .

이 시기의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이 보장되었으나, 전쟁 속에서 많은 위험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위험 속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 많은 결신자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위험한 정치 상황이 오히려 캄보디아 민족이 복음을 수용하고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공산화 된 후에 순교자도 있었고, 어떤 기독교인은 살아서 계속 캄보디아 복음화에 기여한 이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 열매를 보게 되는 줄 믿는다.

5. 크메르 공산당(Democratic Kampuchea)과 선교(1975년부터 1979년까지)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군은 프놈펜을 장악했다. 이들이 들어오기 전에 선교사들은 프놈펜을 빠져나갔다. 크메르 루주군은 모든 지식인, 정치인, 승려, 크리스챤 등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1000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성당과 교회도 파괴되었고 학교도 폐쇄되었다.

불상도 파괴되어 강이나 호수에 버려졌다. 2백 50만의 인구가 강제로 지방으로 이주되고, 강제 노동과 강제 집단생활을 해야 했다.

종교는 금지되고 90%의 승려들이 살해되었다. 도시 시민 수 천 명이 태국 국경에 이주하여 난민 생활을 했다. 이들 중에 수 백 명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음식과 성경을 제공하며 복음을 전했다. O.M.F, Southern Baptist, C&MA, Y.M.C.A, U.N, Red Cross 등이 이들을 도왔다. 캄보디아 내에서 믿었던 자들은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난민촌이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 반면 어떤 성도들은 캄보디아 내에서 믿음을 지키다 죽었다.

비록 이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고 교인의 수적인 성장도 없었지만, 난민촌에서나 이민을 가서 신앙을 지키다가 80년대 말에, 캄보디아로 돌아와 교회를 섬기며 귀한 믿음의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 베트남 통치 시기(The People󰡑Republic of Kampuchea)와 선교(1979년부터 1989년까지)

1977년 12월 캄보디아 동부 지역을 공격한 베트남은 1978년 12월 24일 해군과 공군을 위시해 십만 명 이상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전면 공격을 했다. 군사력이 비교가 안 되는 크메르 루주군은 1979년 1월 7일에 프놈펜을 떠났고, 론놀과 지도부는 북서쪽 태국 국경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도망치면서 추수기의 농지에 불을 질러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그 해에 굶어 죽게 되었다.

베트남은 1977년과 1978년 초에 인질로 데려간 캄보디아 군인들을 훈련시켰는데, 캄보디아를 장악한 후에 이들을 이용하여 캄보디아의 꼭두각시 정부를 구성했다. 수장은 1978년에 숙청을 피해 베트남으로 탈주한 동부 지역 사령관인 헹삼린이었다. 훈센은 1985년에 수상이 된다.

정부는 이 시기에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이론상으로는 말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캄보디아의 토착 종교인 불교와 이슬람교에 대한 인정이었다. 기독교는 프랑스 식민 시대와 미국 침략자들과 연관이 있는 외국 종교로 인식되어 허락이 되지 않았다. 또한 1985년에 훈센은 불교를 국교로 다시 인정했다. 1980년대에 기독교 역사는 크게 쓰여 지지 않았다. 그러나 태국 국경에 있는 피난민촌에서 교회가 생겼고 기독교 구제와 개발 단체, 그리고 의료 선교사들의 봉사가 있었다. C&MA와 C.C.C 선교 단체는 교회 개척과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일을 이곳에서 하였다.

1979년에 태국 내에 있는 난민촌 지역인 Khao 1Dang 산악 지역은 단지 4일 동안에 15만의 이주민이 사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곳은 인구 이동이 심해지는데, 수 만명이 캄보디아로 돌아가고, 또 어떤 자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15만 명의 인구 중에 약 200명이 캄보디아로부터 온 기독교인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Cham Ham 목사와 Uorng Qun 목사 그리고 몇 명의 지도자들에 의해 이 난민 캠프로 인도되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약 이만 명이 믿음을 갖게 되었고, 칠천 명이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또한 삼천 명의 난민들이 미국으로 가서 정착했고 그 중에 과반수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Khao 1 Dang 지역에 있었던 Khao 1 Dang 교회는 1990년에 캄보디아인들이 캄보디아로 돌아가면서 교인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흩어지기 전에 이 교회는 주일에 장년 성도가 70-80명 모였다. 이 교회에서 기독교 문서의 번역을 하였고, 국경의 다른 지역에 문서를 배포하는 일을 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50-60명, 20-30명 모이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C.C.C 선교 단체는 많은 교회들을 개척했고, 안식일교나 로마 카톨릭 성당도 있었다.

난민촌 지역에서 복음주의적 교회는 서로 유대 관계를 가지고 교제를 했다. 이 시기에 교회들은 자립하는 교회가 매우 적었고 외부의 재정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목회자들의 신학 교육 수준이 낮았다. 이 시기에 제자 훈련 교제는 T.E.E가 있었는데, 이 때 훈련을 잘 받은 자들이 나중에 캄보디아로 돌아가서 사역을 잘 감당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 시기에 난민촌 지역에 외국의 도움이 많이 들어 와서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고, 어떤 자들은 이민을 가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이 복음이 확장되는 역할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캄보디아인들의 정서에 기독교는 외국인의 종교이며, 선교사가 섬기는 교회에서 어떤 이익을 보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경향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그들이 믿음으로 갖고 헌금하여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임지고, 또한 다른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도록 선교적 마음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7. 과도기적 정치 상황과 선교(1990년부터 1999년까지)

1979년 1월 캄보디아를 장악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주변 국가와 중공, 미국으로 부터 비난을 받으면서도 소련과 동구 유럽으로부터 군사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캄보디아에 막대한 주둔 경비를 부담하며 버텨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의 개방, 개혁 정책으로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지원이 급격히 줄어들어 홀로 담당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또한 프놈펜 정부는 헌법 개정과 국민 화합 분위기를 만들었고, 프놈펜 정부와 망명 연합 정부의 내전 종식이 무르익어가면서 베트남은 더 이상 캄보디아에 머물 명분을 상실했다. 망명 연합 정부는 1981년 8월 베트남군을 몰아내고 프놈펜 정부를 전복한다는 동일한 목표 아래 구성한 3개 분파로, 크메르 루즈의 ‘민주캄푸치 DK’, 시아누크를 중심으로 한 ‘캄보디아 국민전선 FUNCINPEC’, 손산을 중심으로 한 ‘국민해방전선 KPNLF’ 이였다. 그리하여 1989년 9월 베트남은 잔여 병력 2만 6천명을 철수하여 캄보디아 내정 간섭을 끝냈다.

1991년 10월 파리에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주재로 프놈펜 정부와 연합 정부 3개 분파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평화 협정의 주요 골자는 망명 정부의 병력을 무장 해제하고 캄보디아 주권을 ‘국가 최고 회의 SNC’를 구성하고 유엔의 감시아래 총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SNC의 의장은 평양에서 돌아온 시아누크가 되었고, 그 해 12월 말 유엔 임시 행정 기구(UNTAC)가 들어 와서 선거를 감시하는 가운데 1993년 5월 23일 총선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노로돔 라나리드가 58석을 얻어 제 일 총리가 되고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센이 51석을 차지하여 제 이 총리가 되었다.

1993년 9월21일 제헌 의회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는 입헌 군주제의 캄보디아 왕국의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헌법의 주요 내용은 인권을 중시하는 내용들로써, 민족적 종교적 평등을 보장하며, 사형제도와 성차별을 금지하고,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며, 왕은 상징적 국가 원수로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1998년 7월에 새로운 총선이 있었는데 그 결과는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센이 62석, 라나리드의 훈신펙이 44석을 차지하여, 훈센이 총리가 되고 훈센펙당과 연정을 하게 되었다. 1998년12월에 크메르 루즈의 수장인 폴폿이 죽고 1999년에는 이엥사리와 키우삼판이 투항하고 타목이 체포됨으로 크메르 루주군은 항복하고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는 안정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베트남은 물러 갔지만, 크메르 루주군은 태국 국경에 존재하며 계속 정부를 괴롭히고 망명 연합 정부가 존재하여 권력이 분산되고 정부가 안정되지 않은 과도기적 시기였다.

이 시기에 태국 국경 지역의 난민촌에 있던 많은 자들이 돌아 왔고, 많은 기독교인들 역시 돌아오게 되었다. 80년대 초에 제 3세계로 추방되었다가 90년 초에 학위를 받고 선교사로 돌아온 캄보디아인들이 있었다. 아론 속넵 목사, 꽁판촌 목사, 리시탄 목사, 라다마니캄 목사, 웅쏘펄 목사이다.

1991년에 다니엘 램 목사와 리시탄 목사에 의해 캄보디아 프놈펜 성경 학교가 개교하였고 지금은 정부로부터 학사가 인정된 신학교가 되었다. 1993년에 캔터베리 주교가 캄보디아 정부에게 성공회 사제를 보내 영국 성공회를 프놈펜에 세우기 위해 요청을 했는데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싱가폴 성공회는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돈 코맥(킬링필드 리빙필드 저자) 가정과 두 싱가폴 선교사였다. 이것은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제스쳐였다. 1994년 10월에는 O.M.F 선교 단체가 N.G.O 로 정부에 등록되었다. O.M.F는 인도적인 개발 사역과 동시에 복음 전파와 교회 개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N.G.O 단체이면서 합법적으로 교회 개척을 할 수 있는 단체는 유일하게 이 곳 뿐이다.

1993년에 약 30개 정도의 교회가 프놈펜에 있었는데 아직 교회는 어린 상태였다. 소퐁 박사는 Institute of South East Asian Studies에서 약 2-3만명의 기독교인이 캄보디아에 있다고 했다. 인구를 9백만으로 볼 때 이것은 약 0,2-0,3%이다. 이 기간에 캄보디아 교회는 계속 성장했으나 훈련된 목회자가 부족한 상태였다.

1994년 11월에 마이크 에반스 미국 A.O.G 목사는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집회를 했는데 신유집회를 열고 모든 병자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여 3만-5만 명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자 참석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마이크 에반스 목사와 그의 팀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간신히 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타고 캄보디아를 떠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는 핍박을 받았고, 몇몇 교회는 파괴되었고, 교인을 잃게 되었다.

1995년에 캄보디아 정부는 개신교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기구로 정부를 상대해 주기를 원했는데 E.F.A의 산다라라 박사(Sandararaj)와 W.E.F의 준 벤처(June Vencer)의 방문으로 개신교 연합 친교 단체인 E.F.C(Evangelical Fellowship of Cambodia)가 생겨나게 되었다.

1996년 7월에 A.O.G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이 해에 첫 번째. 청소년 리더십 컨퍼런스(C.C.S Youth Commission)가 깜뽕싸옴시에서 열렸다. 1996년에 4개의 개신교 단체가 정부에 등록을 했는데 그것은 C.C.C, E.F.C, Kampuchea for Christ, Cambodia Baptist Convention이었다.

1997년 7월에 C.P.P의 훈센 제2총리는 제1총리의 훈신펙 당을 공격하여 내전이 발생해 많은 선교사들이 이웃 나라로 피신하였고, 약 100명이 사망했다.

1998년 7월의 총선에서 훈센이 단독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 12월에 폴폿은 사망했고, 1999년 타목이 체포되었고, 공산군이 투항하므로 정부는 개인이 총을 소지할 수 없는 법을 제정함으로 총소리가 사라지고 안정과 평화의 분위가 생겨났다.

1999년 교회는 약 700개가 되었고, 교인은 삼 만에서 사 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12월에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E.F.C, Kampuchea for Christ, C.C.C, the Baptist Federation이 연합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는 침묵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임으로 기독교인들의 잠재력을 깨우며 격려하는 시간들이 되었다. 이 때를 시작으로 캄보디아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다리며 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8. 정치적 안정 및 경제적 발전과 선교(2000부터 20009년까지)

1999년에 크메르 루주군이 사라짐으로 2000년부터는 훈센의 통치아래 정치적 안정이 있어 왔다. 훈센은 캄보디아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해외 유치에 힘을 썼다. 그리고 2003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명박 현 대통령을 불러 경제적 자문을 구하고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우고 따라 하기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부는 선교 활동에 대해 별로 제재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사를 비롯해 많은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교회 개척이 늘어 나고 교인이 늘어 나는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의 선교 활동을 살펴보면 2000년에 꽁판촌 캄보디아 현지목사는 프놈펜에서 깜뽕츠낭으로 선교지를 옮겨 Kompong Chnang Evangelical Association 센타를 세워 선교를 해오고 있다. 배리 와이트 선교사 가족은 소수 민족이 많고 프놈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라따나끼로 주로 가서 목회자 훈련 사역을 했다. 이 해에 최초의 전문 기독교 서점인 Family Bookstore가 프놈펜에 생겼는데 주로 영문판 서적이 많다.

2001년에 E.F.C 총무 헹첸 목사는 기독교 통계를 냈는데, 교회는 1000개이고 장년 성도는 6만이라고 했다. 장년 성도가 150명 이상 교회는 10%, 장년 성도가 약 100명인 교회는 20%, 장년 성도가 약 50명인 교회는 40%, 장년 성도가 20-25명인 교회는 30%라고 통계를 냈다.

E.F.C는 정부를 상대로 교회 상황을 보고하는 가장 큰 개신교 연합 단체인데 20개 도 4개 도시의 약 75%가 E.F.C 산하에 있다. 이제 까지 정부를 상대로 활동하는 기독교 단체는 4개였는데 2001년에 6개 단체가 되었다.

2002년에 ASEAN 정상 회담이 열려 프놈펜 시내의 주요 도로가 포장되었고, 대외적으로 안전한 나라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3년에 태국인 여배우가 인터뷰에서 캄보디아가 태국의 앙코르왓을 훔쳐갔다는 말을 했다고 캄보디아인들에게 소문이 퍼졌다. 훈센 총리가 라디오에서 그 소문이 사실임을 언급했다. 이로 인해 1월 29일과 30일 캄보디아인들이 태국 대사관에 불을 지르고 태국인 사업장인 Royal Phnompenh hotel 등 여러 건물을 파괴했다. 이 일로 인해 약 5천만 달러의 손해 가 발생했는데, 캄보디아 외무부 장관이 태국에 가서 사과하고 손해 배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훈센이 민족주의자임을 나타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선교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2003년에 미국에서 살다 온 캄보디아 목사 웅띠(Ung Thy)는 나사렛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상원 의원이기도 한 그는 내무부에 가서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그의 리더쉽 아래 하나의 단체로 정부를 상대하도록 시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회들에게 내무부의 이름과 도장이 있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모든 교회들이 그의 협의회 아래에 등록이 되어야 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종교부는 6개 협의회에 편지하기를 현재 상태로 모든 협의회는 종교부와 법적인 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확고한 대답을 주었다. 이것은 내무부와 종교부와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혼선을 빚은 것인데, 결국 웅띠의 뜻대로 되지 않고 현재 까지 모든 협의회와 교회들은 종교부의 허락아래서 종교 활동을 허락받고 있다. 그 때 땅벡홍 목사, 임촘 목사, 웅비볼 목사가 웅띠 목사와 합세했다.

2003년에 종교부는 선교사가 각 가정을 방문해서 전도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은 주로 몰몬교나 여호와 증인 등의 이단들이 눈에 띄게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종교를 모욕하는 것을 금했는데 특히 국교인 불교에 대해 비방하는 것을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캄보디아 정부는 불교, 이슬람교, 카톨릭, 개신교가 서로 좋은 관계로 지내도록 조용히 일해 왔다. 이 해에 Words of Life의 스티브 하이드(Steve Hyde)는 정부의 통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말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 종족 짬족이 거이 70만명으로 인구의 5.4%, 그 외의 불교인이 아닌 소수 종족이 50만으로 3.8%, 기독교가 장년 성도만 20만으로 1.5%, 그리고 중국인과 베트남인의 종교가 적어도 7.7%이라면, 캄보디아의 불교인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81.5%이다. 그러나 정부는 항상 캄보디아의 불교인은 95%-99%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단지 장년 성도만을 포함시키고 항상 어린이들은 통계에서 제외되었는데 만약 기독교 어린이까지 기독교인의 수에 포함시킨다면 어린이를 포함한 모든 불교인은 95%도 훨씬 못 미칠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스티브는 번띠미언쩌이 주의 종교부가 보고하기를 매주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가정 교회를 포함해 거의 500개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가진 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프놈펜에는 가정 교회를 포함해 약 200개 교회가 있는데, 각 교회 마다 어른 성도가 평균 30명이라고 했다. 이 해에 스바리엥 주에는 성난 군중 200명이 한 성공회교회를 망치로 부수고 성경과 찬송가를 연못에 던졌다. 마을 사람들은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을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2007년 7월 종교부는 선교사들이 노방 전도나 가정 방문 전도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긴장하며 대책을 의논했는데, 이것 또한 선거전에 있는 연례적인 발표였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선교사 활동을 정부가 핍박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된다. E.F.C는 2008년에 교회가 약 2600개 라고 발표하였고, 캄보디아 모든 마을 약 14000개에 교회를 세운다는 M.K. 2021프로젝트를 가지고 시행하고 있는데 외국 선교사를 포함하여 모든 선교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석하여 모든 마을에 교회를 세워 이 땅에 주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란다.

이 나라 최초의 선교 단체인 C&MA는 1923년에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1993년에는 3개 교회였고 현재 2008년 가정 교회를 포함해 182개 교회를 개척했다. 이 중에 약 50개 교회가 장로가 있고 20명 이상 세례 교인을 가진 교회이다. 130개는 세례 교인이 10명이하인 교회이다. 그리고 캄보디아내에 있는 베트남 교회는 1998년에 3개이었다가 2008년에는 7개 교회가 되었다.

이 단체는 2040년 까지 모든 사역을 마치고 철수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C&MA 선교 단체의 장점은 T.E.E 교재를 가지고 각 마을에서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시키고 가정 교회를 세우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워 주일에 설교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직업을 가진 지도자들(주로 농업)이 평일에는 자신의 일을 하다가 주일에 설교를 하고 교회를 섬기니 목회자 사례비가 적게 들기에 재정적 자립이 가능하다. 그러나 단점이라고 한다면 교회 지도자(설교자)가 신학 교육과 목회 경험이 부족하고 전적으로 목회에 전념하지 못하기에 교회를 성장이 느리고 교인들의 성경 수준이 낮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설교를 하는 교회 지도자가 안수 받은 목회자가 아니기에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하는 일에 있어서 장로교 교리나 헌법과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MA 선교 단체는 캄보디아의 시골 많은 마을에 들어가서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며 많은 교회를 세우는 일과 문서 사역으로 캄보디아 선교에 큰 일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교를 돈으로 하지 않고 현지인들이 자립하며 교회를 섬기게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라 생각한다.

2008년 7월 총선에서 캄보디아 인민당(C.P.P)가 91석을 차지함으로 국회 의원 총 의석수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훈센의 정치력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시기는 선교 활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가운데 또한 이단들 역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몰몬교가 프놈펜 시에 큰 예배당을 지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며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등의 활동이 있어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이 시기의 특징은 캄보디아와 한국간의 친밀한 관계가 급격히 상승했고, 많은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있었다.

9.한국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1993년부터 20009년 현재 까지)

한국 선교사의 선교 활동은 강창윤 선교사가 1993년 1월에 입국하므로 시작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교회 개척, 유치원 사역, 학교 사역, 대학생 기숙사 사역, 병원 사역, 문서 사역, 음악 사역, 고아원 사역, 지역 개발 사역, N.G.O 사역 등 다양한 사역으로 이 나라 복음화에 기여 했다. 특히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인 2000년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2009년 현재 한인 선교사회에 등록된 선교사는 241 가정(unit)이다.

1995년에 들어 와서 척추 교정과 교회 개척 사역을 한 오형석 선교사는 1997년 7월의 내전으로 인해 한국에 잠시 방문하고 돌아 오다가 비행기 사고로 가족 모두 순교함으로 이 땅에 귀한 축복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 중에서도 특히 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두드러 졌다고 본다.

먼저 감리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보면, 감리교 선교사로 1993년 6월에 최초로 들어 온 송진섭 선교사는 1995년에 감리교 선타를 세워 교회 개척을 중점적으로 하다가 1997년에 캄보디아 감리교 신학교를 창립, 운영하였다. 1998년에 바탐방에 2000년에 깜뽕짬시에 선교 선타를 마련하여 사역하여, 1998년에 51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다가 2003년에 스위스/프랑스 감리 교회, 미국 연합 감리 교회, 싱가폴 감리 교회, 세계 중국인 감리 교회 연합회가 연합하여 사역하기 위해 캄보디아 감리교 연합 선교부(Methodist Mission in Cambodia)인 M.M.C를 조직하여 2004년에 제 1회 연례 회의를 개최하였다.

2000년 8월 연회 통계 서기에 의하면 전국에 10개 지방 연회에 142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으며, 매 주일 평균 출석 성도는 어린이 포함하여 5200명으로 집계되었다. M.M.C내에는 12명의 현지인 정회원 목사와, 19명의 집사가 세워졌다.(7-9).

M.M.C는 조직을 시간 계획아래 2004-2008년을 연합 선교부가 주도하는 기간으로 현지인 교회와 선교부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보았다. 2008년-2012년까지는 선교 연회 기간(Mission Conference)으로 현지인 교회는 청소년기로 전보다 훨씬 많은 자치권을 가지고 책임있는 결정을 하는 기간으로 본다. 그리고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임시 연회(Provisional Coference) 기간으로 현지인 교회가 성년이 되어 캄보디아 감리교회는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독립 교회로서의 다른 외국 감리 교회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2016년에는 캄보디아 감리교 정식 연회를 조직하고 최초의 감독을 선출한다는 계획이다. M.M.C는 캄보디아 캄보디아 감리교를 토착 교회로 만들어 자립, 자치, 자전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M.M.C의 고무적인 일은 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감리교를 세웠다는 것과 2016년까지 토착 교회를 세워 자립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현지인 감독을 세워 지도력을 이양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당히 단시일에 (12년만에) 자립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한국 선교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볼 수 있다.

장로교 선교사 사역을 살펴보면, 1993년 1월에 최초로 들어 온 강창윤 선교사에 의해 캄보이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각자의 교단과 선교단체에 따라 선교하다가 하나의 장로교회를 캄보디아에 세운다는 목표로 2003년 7월9일 캄보디아 장로공의회(The Council of Presbyterian Church in Cambodia,약칭 CPCC) 창립 총회를 가졌는데 7개 교단(합동,통합,고신,대신,고려,개혁,합신)의 23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2004년 10월5일에 캄보디아 장로공의회 한인 선교사들은 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를 개교하여 2008년 8월 25일 제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했고, 2008년 8월에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 신학연구원을 시작했다.

장로교 공의회는 2007년 10월 18일에 정기총회시에 각 교단에서 대표를 파송하여 협의 결정하는 교단 협의회로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합동, 통합, 고신, 대신, 미주, 연합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장로교 공의회 선교사는 180명의 회원으로 이들이 세운 교회는 118개의 교회와 처소(이중에 종교부의 인가를 받은 교회는 41개)로 5143명의 성인 교인 중 1242명은 세례 교인이다. 그리고 41개의 학교와 기관이 있다.

장로교 공의회는 현재까지 E.F.C 단체아래 있으나, 직접 종교부와 관계하며 교회 허가서를 받기 위한 일을 하고 있으며 조만간 허가가 날 것으로 본다.

이미 한국 장로교가 많은 분열을 맛보았으나, 캄보디아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의 장로교 교단을 세우며, 함께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사역을 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한다.

주한 장로교 공의회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장로교 공의회를 구성하여 4개의 선교부가 참여하였다(1889-1898년). 그리고 1901년 평양 신학교를 개교하고, 1907년에 7개의 소회가 하나의 독노회를 시작하고, 1912년에 총회를 하여 한국인에게 지도력을 이양하였다. 약 23년만에 지도력을 이양했다. 캄보디아 장로 공의회도 구체적인 이양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현지인들이 지도력을 이양하여 캄보디아를 복음화하기를 기대한다.

Ⅲ. 결론

캄보디아의 선교의 역사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많은 영향이 있었음을 보았다. 프랑스 식민 통치 기간인 1863년부터 1953년까지 기간 중에 1923년 C&MA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카톨릭 선교사 그리고 캄보디아 정부 모두 개신교 선교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눈물로 선교의 씨를 뿌려 그 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선교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시아누크의 불교적 사회주의 시기인 1954년부터 1970년까지 역시 시아누크는 친 불교적인 자로 선교사들을 핍박했다. 1965년에는 C&MA 선교사들이 추방되기도 하고, 교회 문을 닫도록 명령을 받았고, 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히기고 했다. 하지만 믿음의 인내로 주님을 섬긴 역사들이 캄보디아 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놓았다.

이런 핍박을 견디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론놀 공화국 시기에 선교사의 활동은 자유롭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을 비롯해 많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크메르 루주군의 잦은 침략으로 불안 국민들은 참된 안식처를 찾아 주님께로 나오는 기회가 되어,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주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이 땅에서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심을 볼 수 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 루주군은 이 땅의 많은 국민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 넣었다. 그리하여 많은 난민들이 태국 국경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선교 활동이 일어나 교회들이 개척되고 많은 자들이 주님께 돌아 왔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제3세계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주님을 믿고 섬겼다. 이들 피난민과 이민자들 중에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이 되어 1990년대에 캄보디아에 돌아 와서 각 지역에서 귀한 일꾼들이 되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베트남 통치 기간 역시 선교나 믿음 생활은 보장되지 않았다. 이 시기 역시 캄보디아 국경 난민촌에서 성도들이 훈련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는 정치적 과도기로 크메르 루주군이 잔재하고 정부가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의 자유가 있었고 난민촌에서 기독교인들이 돌아오고 제3세계에서 목회자들이 훈련 받고 돌아 와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와 교인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2000년부터 20008년까지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의 시기로 선교의 자유로 특히 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 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여러 가지 사역을 하므로 이 나라 기독교 부흥에 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선교의 역사를 볼 때 정치 상황과 선교는 깊은 연관성을 맺어 옴을 볼 수 있다. 여러 정치 상황 속에서도 선교는 쉬지 않았고 주님은 구원의 역사를 쉬지 않으셨다. 캄보디아 성도들이 고난 중에 부르짖음으로 현재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 믿는자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맞은 선교사들은 과거의 고난의 시대를 기억하며 이 안정시대에 안주하며 게으르지 말고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 나라 역시 한국처럼 믿음의 복을 받아 교회가 부흥하여 선교사를 받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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