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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선교 방향연구 biit 2009-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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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선교 방향연구

권오학 선교사

GMS 우간다 선교사




1. 우간다에 대한 일반적 고찰

아프리카 동부 내륙에 위치한 우간다는 일찍이 영국의 윈스톤 처칠(Winston Churchill) 경에 의해 ‘아프리카의 흑진주’라고 불릴 만큼 좋은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우간다는 241,040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가졌고 인구는 21,778,000명이며 15세 이하가 10,902,000명으로 젊은 나라이다. 우간다는 비옥한 땅과 충분한 강우량으로 풍성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의 곡창지역이다.

1874년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가 우간다 왕 무테사1세(Kabaka Mutesa I)를 만남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다. 무테사 I 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Mwanga)은 크리스천들을 핍박하여 200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나오게 하였다. 우간다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초기부터 순교자들의 피가 흘려졌다. 한때 악명 높았던 이디 아민(Idi Amin: 1971-79)의 통치기간 중 300,000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다수는 크리스천들이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기독교로 인해 핍박을 받았던 국가 중 하나이다. 우간다 종교 분포를 보면 기독교, 모슬렘, 토착 종교, 기타의 종교들이 있다. 이디 아민이 집권할 때에 우간다 정부가 모슬렘 우호정책으로 숫자가 급격히 증가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현재는 5-6퍼센트 정도로 보고 되고 있다.

우간다 주변에는 수단, 콩고, 루안다, 탄자니아, 케냐 등의 인접 국가들이 있고 케냐를 제외한 4개국의 난민들이 우간다에 들어와 난민촌을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간다 안에서 여려 나라를 볼 수 있고 아프리카 대륙의 중요한 선교전략 지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간다 내에 많은 NGO 구호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간다는 56개 이상의 부족들이 있지만 크게 네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반투족(Bantu), 나일족(Nilotic), 수단족 (Sudanic) 및 기타 다른 부족들이다.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구약 성경은 15개 언어로, 신약만은 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문자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62퍼센트 정도이다.

수도 캄팔라는 여러 부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으며 인구는 백 이십만 명 정도이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거주하는 비율이 14.16퍼센트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매년 도시로 모여드는 비율도 5.5퍼센트로 높아지고 있다. 우간다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은 우간다 전체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의식하여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수도 캄팔라에서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었고 현지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체하며 우간다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간다는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정치적인 불안정이 계속 되었다. 1986년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오랜 내분으로 비롯된 경제 및 정치적 침체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으며,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을 향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간다는 1996년과 2001년에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함으로써 현재 대통령과 정부에 신뢰를 주었고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인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정부는 경제 성장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를 위해 많은 혜택을 주어 생산시설을 유치시키고 노동자들이 직업을 얻는 데에 힘쓰고 있다. 나아가 우간다 주변 나라들에 시장을 확보하여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도 도모하고 있다.

우간다 교회는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기타 개신교 교회들과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들이 있다. 우간다는 영국 식민지(1890-1962) 아래에서 기독교가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문화로서 기독교가 받아들여졌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그들이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교회 분위기는 불행히도 명목상의 많은 크리스천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간다 교회는 이제 내적으로 더욱 성장할 필요가 있으며, 또 나아가서 우간다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좀더 성경적인 개혁을 도모할 필요가 요구되고 있다.

2. 우간다에서의 KEMAN 사역

1989년 케냐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한성수와 김철수 선교사들로 통해 우간다 KEMAN 선교사역은 시작되었다. 이 두 명의 선교사들은 우간다 장로교회의 요청으로 수도 캄팔라를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몇 차례 목회자 세미나를 하게 되면서 우간다 선교에 열정을 갖게 되었다. 우간다 사회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질서 유지와 사회 안정에 최우선을 두고 있었다. 한국 선교사들로는 두 명의 여성 선교사들이 북부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당시 우간다는 많은 선교사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한, 김 두 선교사들은 우간다 장로교(Presbyterian Church of Uganda)와 접촉하면서 우간다에서의 선교사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이들은 1990년 11월 우간다 정부로부터 비영리사단법인체 NGO (Non Government Organization)를 인가 받아 사역의 기반을 갖게 되었다.

본 연구자는 1991년 1월에 우간다에 입국하였고, 준비된 기반 위에서 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 우간다 장로교의 결의로 목사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크리스천 종합 대학을 꿈꾸며 추진하였던 부지 160에이커의 땅이 91년 11월 등기되었다. 본 연구자는 Kefa Sempangi 목사가 운영하였던 ‘Africa Foundation’ 고아원 사역에 참여하였고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이 고아원에 한국관을 건축하게 되었다. 91년 5월 이 대학 부지에 기초돌을 놓으면서 KEMAN 선교회의 사역을 우간다 안에서 그리고 한국교회에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8월에 나무란다 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시작하였다. KEMAN은 우간다 장로교와 협력하여 초 교파적 신학교를 93년 1월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우간다 장로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체계적인 성경학교나 신학교가 없었다. 그 당시 형편은 미국의 단기 선교사들이 우간다에 와서 몇 주간 머무르며 목회자들과 장래 목회자 후보생들을 위해 집중 강의로 통하여 몇 과목을 가르쳤고 ,그 과목들을 마치게 되면 단기 선교사들과 몇 명의 우간다 목사들이 함께 이들에게 안수하여 허가를 받은 목회자로 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이었으므로 체계적인 성경신학과 실천신학 등을 가르치는 성경대학은 장로교와 다른 복음적인 교회에서도 절실히 요구되었다.

KEMAN 선교부가 우간다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우간다 장로교는 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교회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던 KEMAN 선교부는 우간다에서 지도적 위치에서 현지목사들과 사역하지 않았고 상호 협력하면서 우간다 장로교회의 증가와 성장을 위해 함께 의논하면서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사역하였다. 이것은 선교부가 우간다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선교부의 신앙고백과 방향을 규약에 명시하였다.

KEMAN 선교부는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선교사 개인 중심으로 사역하기보다는 팀으로서 함께 사역하였다. 현지 교회의 지도자들과도 팀을 이루어 사역하며 그들을 섬기고자 하였다. 한국의 후원교회도 한 교회가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두 교회가 연합하여 진행하였고 이제는 더 많은 교회들이 참여하여 함께 사역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의 팀 선교에 좋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KEMAN이 우간다에서 팀 선교로 시작되었고 현재도 선교사 여섯 가정이 팀을 이루어서 교회개척 사역, 신학교 사역, 유치원과 초등학교 사역, 현지 목회자 세미나 사역, 전도 집회 사역 등을 하고 있다.

KEMAN은 선교의 모델을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교회 사도들의 사역에서 찾고자한다. 선교사들과 현지 목회자들과의 연합 사역은 우간다 선교에 대단히 중요한 모델을 제시하였고, 교회사역과 신학교 사역 및 기타 사역들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우간다에서의 KEMAN 선교사역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9년, 케냐에서 사역하던 한성수 선교사와 김철수 선교사에 의해 KEMAN 선교사역은 시작되었다. 두 선교사는 캄팔라 제일장로교회의 초청으로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강사로 여러 번 오게 되었다. 이들은 우간다 방문과 사역을 진행하면서 앞으로 KEMAN 선교부가 일할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하였다. 1990년 11월 KEMAN NGO (Non Government Organization)가 정부에 등록되면서 합법적인 사역의 초석이 놓이게 되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선교부가 본 연구자를 우간다 선교사로 1990년 12월에 파송하였고, 본인은 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본 연구자는 우간다 장로교단(Presbyterian Church of Uganda)의 목사 선교사로서 교단에서 요청하였던 교회 개척 및 신학교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며 고아들을 위한 간접적인 사역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역들을 하면서 본 연구자가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현지 목회자들과 교인들과의 인격적인 깊은 관계야말로 성공적인 선교의 열쇠라는 사실이었다. 이들과 동역자로서 한 팀을 이룸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주면서 함께 기도하며 동역할 수 있었기에 사역들은 점차 견실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소그룹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우간다 KEMAN의 그동안의 선교 사역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역별로 검토하면서 소그룹 사역의 필요성을 점검하여 보고자 한다.

1. 우간다 교회

우간다에서는 영국 식민지(1890-1962) 기간 동안에 서구 선교사들을 통하여 기독교가 소개되고 받아들여졌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한때는 사회적 지위 향상에 도 움이 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교회 분위기는 불행하게도 명목상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발전에 끼친 좋은 면도 많이 있었다. 선교사들과 현지 목회자들이 여러 지역에서 교회 개척과 함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교육 여건을 교회가 준비하여 줌으로써--즉, 기독교와 학교 교육을 함께 보급하여 줌으로써-- 지역 주민들이 미신적인 전통들과 악습을 버리고 좀더 합리적인 민주 사회를 만드는 데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나아가 순회 의료 활동과 고아사역 등에도 봉사의 손을 펼쳐 질병과 고통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 봉사로 주민들은 교회가 좋은 이웃이고 도움을 주는 단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간다 교회는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그밖에 기타 개신교 교회들과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들도 상당수 있다. 우간다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 마치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아직도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미자립교회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교회 내에 아직도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문화적으로 또는 전통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아직도 미결된 상태에 있고 또 기독교 복음과 상충되는 사회 관습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간다 교회는 많은 영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최근에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교회 봉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외부의 선교단체들과 연합 전도 집회를 열어 우간다 사회와 교회에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키는 데에 또한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세미나와 집회들은 우간다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앞으로 교회가 질적인 성장을 계속 추구한다면 우간다와 아프리카 선교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믿는다. 우간다 교회는 잘못된 전통 문화를 개혁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우는 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2. 우간다 목회자

우간다 교회들을 봉사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숫자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아직도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신학교가 몇 개 되지 않고 그 시설과 운영도 빈약하다. 교회들이 예비 목회자를 선발하여 신학교로 보내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필요한 학비를 지원하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들은 이러한 사명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목회자의 수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아직도 많은 지역 교회들을 봉사하고 있다.

이러한 평신도들은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 준비한 세미나에 한두 번 참석하고, 한국식으로 하면 전도사 급에 임명되어 교회를 봉사하게 된다. 이들은 체계적으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봉사에 대한 이해와 헌신과 사명감이 대체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예배 시 설교 메시지의 내용도 복음적이지 않을 때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봉사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안수 받은 목회자(ordained pastor)들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지만, 안수 받은 목회자 한 사람이 수십 개의 교회를 책임지고 돌아보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 성장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의 사례비의 경우를 보더라도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목회자들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에 상당히 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목회자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헌신이 부재해 보이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초기 우간다 목회자들은 서구의 선교사들과 함께--본인들은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사례나 보조를 받으면서--교인들과 다른 현지인들을 구제하고 돕는 위치에 있었다. 그 결과 교인들은 목회자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목회자들의 생활비에 대한 현지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을 종종 본다. 이로 인하여 목회자들은 생계를 위하여 교회 사역 외에 다른 직업을 갖게 되는데, 그 결과 목회자의 집중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는 교회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수적으로 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목회자들의 헌신이 많이 부족한 우간다 교회는 그동안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고, 이것은 앞으로 우간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하여 반드시 점검하고 넘어가야 할 교회론적 이슈가 되고 있다.

1. 나무란다 복음 교회(Evangelical Church of Namulanda)

가. 교회 배경과 시작

나무란다(Namulanda)는 수도 캄팔라에서 20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있다. 주민들은 천 명 정도이고 대부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기업 형태의 농장들(화훼 농장)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빅토리아 호수에 인접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거주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교회 개척 당시에 나무란다에는 우간다 성공회 교회만 하나 있었는데 매우 작은 건물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본 연구자는 신학교 부지에서 가까운 나무란다 지역을 첫 교회 개척지로 정하고 1992년 2월에 부지 4에이커를 구입하였다. 이 부지는 포장된 도로에서 조금 옆에 위치하였는데 교통과 경관이 좋았다. 이 부지는 교회당과 유치원, 선교 사무실과 게스트 하우스 등 다용도로 사용하기에 매우 편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선교의 베이스 역할을 하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본 연구자는 먼저 교회 부지에 전도사 숙소를 건축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당시 본 연구자는 아침부터 일꾼들과 같이 건축 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점심 식사 후에는 이들과 같이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건축 공사가 계속 진행되면서 일꾼들이 하나 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숙소와 예배당이 완공되었을 때 캄팔라 제일장로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이 전도팀을 구성하여 전도 집회를 나무란다에서 열었고, 가정 방문을 하면서 교회 개척을 도왔다. 이러한 성도들의 도움으로 나무란다 교회는 92년 8월에 시작되었다. 엔테베 장로교회에서도 집사 한분을 보내어 주어서 본 연구자와 함께 교회를 봉사하도록 도와주었다.

나. 유치원 사역과 오후 학교

나무란다 복음교회는 교인들과 주변의 사람들의 요청으로 1993년 1월부터 유치원 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교회 유치원은 교인들과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무료로 학생들을 받았다. 한국에서 교회 유치원 사역을 하였던 본 연구자의 아내 김명옥 선교사가 책임자로서 일하게 되었다. 교인 중에서도 한 명의 교사를 채용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처음에는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등록하였지만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유치원 건물이 없어서 교회당 안에서 시작하였다. 유치원 사역은 유아들의 교육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부모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97년부터는 유치원 등록비도 받게 되었다. 고아들과 극빈자 아이들은 교회의 동의를 얻어 등록비를 면제하여 주었다. 지난 99년부터는 70명 정도의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오후학교 사역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초등학교에 가서 공부 할 수 없었던 아이들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오후학교는 교회 예배당과 주변의 나무 아래에서 칠판과 의자 몇 개를 마련하여 시작하였다. 마을과 주변 지역에서 학교에 갈수 없었던 아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100명 정도의 아이들로 시작하였는데 몇 개월 동안에 3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 오후학교 사역은 늘어난 아이들을 모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에 초등학교 사역을 하고 있던 한인 선교사 한분이 캄팔라에서 나무란다 지역으로 옮겨와서 초등학교를 건축하였다. 오후학교 사역이 7개월 정도 되었을 때에 그의 초등학교 건물이 완공되어 학생들을 그쪽으로 보내어 정규 학교 과정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학교 사역은 정부의 인가를 얻지 않아도 묵인되었던 상황이었다. 그 후에 그 학교는 정부로부터 학교 인가를 받아서 현재 좋은 학교가 되었다. 그때에 공부하였던 학생들 중에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있고, 나무란다 복음교회의 좋은 일꾼으로 봉사하고 있는 교인들도 있다. 유치원과 오후 학교 사역들은 장래의 교회 사역과 소그룹 사역의 씨앗이 되었던 사람 양성의 좋은 모판사역이었다고 본 연구자는 평가한다.

다. 나무란다 복음교회와 소그룹 사역

우간다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 왜야하면 국가의 공용어가 영어이고 사람들은 자기의 지역 언어들을 각각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목회자는 교회 예배 시간에 영어를 사용하고 보조 사역자가 그 지방 언어로 통역하게 된다. 본 연구자는 영어만 사용하였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받지 못한 교인들과 대화할 때에 그들의 언어로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나눌 수 없었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역의 효과를 증진하기 위하여서 소그룹 환경의 필요성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나무란다 복음교회는 2002년 1월부터 교인들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반을 조직하였다. 초신자 기초반은 교회 전도사가 인도하였다. 본 연구자는 남자 반을 인도하였고 김 명옥 선교사는 여자 반을 인도하였다. 처음에는 신약 성경을 교재로 하여 같이 공부를 하였다. 그 후에 서울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교재를 사용하여 1년 정도 공부하였다. 성경공부에 참여하였던 교인들은 어느 정도 믿음이 성숙하게 되어 교회학교의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나무란다 복음교회는 1995년에 200명 정도의 장년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지만 본 연구자의 안식년(1995년 5월-96년 7월)과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침체되는 아픔도 있었다. 본 연구자의 안식년 이후(1996년 8월부터) 교회는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고, 매일 아침 7시에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 모임 외에도 주 중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는 모임과 금요 기도회 모임을 지속하여 갖기 시작하였다.

나무란다 복음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던 요인들을, 앞으로 실시하고자 하는 소그룹 사역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평가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여 대부분의 필요한 부분들을 맡아서 봉사를 하였기 때문에 교인들이 너무 의존적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주인의식이 결핍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도 의욕도 약할 수밖에 없었다. 소그룹 사역을 실시하게 되면 이러한 주인의식의 문제도 해결되고 전도 의욕도 높아질 것으로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으로 성숙한 제자들이 되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선교사인 목회자와 교인들이 깊은 대화를 나누는 데에 한계가 있었는데, 이러한 문화적 거리감은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할 때에 겪는 장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 소그룹 사역을 실시하게 되면 선교사에 대한 의존성의 문제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그룹 리더와의 깊은 대화가 가능하므로 교회가 더욱 생동감이 있게 될 것이다.

셋째, 도시 주변이나 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할 경우 도시 이민 현상으로 인하여 교회에 필요한 일꾼들이 점점 줄어드는 문제이다. 수도 캄팔라에서 벗어난 지역에 위치한 나무란다 복음교회는 이로 인하여 평신도 수급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앞으로 소그룹 사역을 실행할 경우 염두에 두어야 할 난관이기도 하다.

넷째, 교인들 중에 문맹자들이 많아 성경 읽기와 공부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점이다. 이는 앞으로 실행할 소그룹 사역의 방향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즉, 문맹인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킬 경우 아프리카의 구전적인 전통의 장점을 살려 성경을 암송하게 하는 것과, 소그룹 활동 중 하나를 문맹 퇴치 사역과 연결하여 실시하는 것 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교인들이 교회예배에 자주 결석함으로써 신앙생활에 성장이 부진한 점이다. 이 문제 역시 소그룹 사역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소그룹 사역의 장점이 구성원들 한사람 한사람을 영적으로 밀접하게 관리할 수 있는 것이므로, 나무란다 교회에서 자주 보게 되는 ‘맹목적’인 기독교의 병폐를 소그룹의 사역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칸상가 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 of Kansanga)

가. 교회의 배경과 시작

우간다 수도 캄팔라(Kampala)는 인구 1,200,000명이 넘는 도시이다. 독립 이후 여러 번의 내전으로 도시의 발전이 활발하지 못하였다가 1986년 현 정부가 집권하면서 안정되었고 경제 발전과 함께 도시 인구도 많이 증가하게 되었다. 캄팔라 도시 안에는 여러 지역에서 온 많은 부족들이 어우러져 생활하고 있다. 캄팔라는 우간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고 선교의 관문이다.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들의 정보와 협력을 얻어 그들의 고향에 있는 부족인들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사역 초기부터 수도에서 교회개척과 함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3년에 시내의 주거 지역에 2에이커(2,400평)의 땅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교회를 개척하여 정식으로 교회를 열게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칸상가 교회는 부지를 구입한지 만 8년이 지나서야 첫 예배를 정식으로 드리고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본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신학교의 신학생 한 사람이 전도사로 수고하고 있다.

칸상가 복음교회의 교인은 농촌에서 직업을 찾아온 젊은 사람들의 수가 많다. 이들은 대부분이 작은 셋집에 거하며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매우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때로는 그 직업도 잃게 되어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들은 절대 빈곤에 처하여 있는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가난한 도시 빈민들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복음 사역을 하기 위하여서는 소그룹 사역은 여러 면에서 필요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필요성에 대하여서는 이후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 유치원 사역과 성경읽기 사역

칸상가 교인들과 주변 사람들의 요청으로 2001년 2월부터 유치원 사역을 시작하였다. 나무란다와 같이 교회 주위의 주민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무료 유치원으로 시작하였다. 나무란다 교회 유치원 사역을 하였던 김명옥 선교사가 처음부터 책임자로서 일하게 되었다. 우간다 교사는 주변에서 한 사람을 채용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처음에는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등록하였지만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유치원 건물이 없어서 교회당 안에 칠판과 책상 걸상을 준비하여 시작하였다. 유치원 사역은 유아들의 교육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주게 되었다. 일년 후 아이들이 늘어나서 50여명이 되었고 한 명의 교사를 더 채용하여 두 명의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아이들 놀이시설을 설치하지는 못하였지만 넓은 공간을 이용하여 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칸상가 복음교회는 동시에 어른 여자 교인들을 위해 성경읽기 공부 모임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문맹자들이었다. 교회의 전도사가 직접 이 사역을 담당하였는데 6-8명 정도의 소수가 참석하였다. 전도사는 주 중에 유치원이 끝난 오후 시간을 정하여 ‘루간다’어로 성경읽기와 쓰기를 지도 하였다. 배우는 교인들은 성경을 읽고 쓰게 되면서 신앙이 조금씩 자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성경 읽기 및 쓰기 공부 모임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치게 될 소그룹 사역의 모판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 교회 예배와 성경공부

우간다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3시간 정도이다. 성경공부 시간을 40분 정도하고, 찬양과 복음 송가를 30분 정도 부른다. 그리고 교인들이 간증을 하고 교회와 성도들의 내용을 광고하게 된다. 성가대의 복음송들과 특별 찬양 순서도 있다. 교인들이 헌금하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때에 짧은 교제의 시간도 갖게 된다. 설교는 맨 나중에 하는데 50분 정도 하게 된다. 우간다 교인들은 조급하지 않고 인내심이 많아서 몇 시간을 앉아서 예배드린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 중에 한번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교회 활동을 이 시간에 계획하여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 분위기가 때때로 정숙하지 못하고 흐트러질 때도 있다.

칸상가 복음교회 어린이 주일학교는 주일 9시부터 시작된다. 두 명의 교사들이 30여명의 아이들에게 복음송과 율동을 가르친다. 우간다 복음주의 주일학교 성경공과책을 사용하여 아이들을 가르친다. 유치원 아이들은 그림도 그리고 교사로부터 성경 이야기도 듣게 된다. 아직 주일학교 교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개 반으로 나누어 하지 못하고 두 개 반으로 나누어 하기 때문에 나이든 아이들이 많이 출석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주일학교 사역에 비중을 두려고 한다. 이를 위해 좋은 교사들을 육성하고 이들에게 반을 맡겨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칸상가 복음교회는 주일 아침 예배를 10시부터 성경공부로 시작한다. 본 교회 담임인 무테비(Mutebi)전도사가 어른 성경공부를 책임 맡고 있다. 성경공부를 마치면 교인들이 한 주간의 생활을 간증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모두 일어나서 우간다 식의 독특한 몸동작으로 찬송가와 복음송을 부른다. 그 뒤 헌금을 한 후에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 중에 병든 자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교제를 나누게 된다. 칸상가 교회는 주일 예배에 어른이 25명 정도, 어린이들이 40여명 모여 예배를 드린다.

칸상가 복음교회 성경공부는 금요일 오후에 있다. 4-6명 정도가 모여 공부하는데 무테비 전도사가 인도하고 있다. 서울 사랑의 교회 성경공부 교재를 영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성경 공부교재 한 권을 마쳤을 때 잠시 방학을 한다. 현재 칸상가 복음교회는 KEMAN 선교회의 동료 선교사와 무테비 전도사가 협력하여 교회 예배와 성경공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3. 교회사역의 진단과 방향

나무란다 복음교회는 그동안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이들에게도 교육적인 도움을 계속 주고 있다. 이제 교회 사역도 10년이 넘어섰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었지만 얼마 후에는 또 많은 사람들이 열려진 뒷문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하였던 것이 큰 문제점이었는데, 선교사인 담임 목사가 아무리 헌신적으로 사역하여도 현지의 좋은 일군들이 돕지 않으면 그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본 연구자는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자는 좋은 일군들을 양성하는 데에 앞으로 더욱 매진하고자 하며, 이것은 소그룹의 리더들을 양육함으로써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칸상가 복음교회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아직 개척 교회와 같은 연약한 상태이지만, 목회자가 교회의 목표와 방향을 확신 가운데 분명하게 제시하고 교인들을 이끌어 나가기만 한다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교회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성경읽기 모임과 성경공부 반을 십분 활용하여 소그룹 사역의 형태로 발전시킨다면 큰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교회 사역에 밝은 전망을 주고 있다.

칸상가 복음교회에서 2년 전에 염소 프로젝트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역은 일시적으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지속적인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교회의 영적 성장은 역시 말씀 사역에 기초해야 함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교회의 말씀 사역은 설교 및 주일 성경공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말씀이 삶 속에 적용되기 위하여 소그룹 중심의 사역이 필요한 것을 보게 된다. 앞으로 본 연구자가 사역해 온 위의 두 교회와 새로 개척되는 교회들은 소그룹 사역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소그룹 사역을 기획하면서 본 연구자는 몇 가지 반드시 주의할 점들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교회 사역은 복합적이어야 한다. 소그룹 사역이 절실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그룹 사역으로만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장한 교회들의 공통성을 몇 가지를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의 목회철학이 분명한 점이다. 교회 지도자는 목회에 대한 분명한 목회 방향과 목표를 가져야 한다. 둘째,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교회를 봉사하다는 점이다. 혼자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는 없다. 목회자의 지도력에 교인들은 좋은 일꾼들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공한 목회자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는 사람이다. 셋째, 성공한 교회의 목회자는 자신과 모든 교인들이 영성에 항상 우선순위를 둔 사람들이다.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되었다. 기도운동은 성령님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인본적인 노력이나 운동은 영적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 넷째, 성장한 교회의 목회자의 메시지는 항상 성경적이며 복음적이고, 또 교인들에게 비전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오늘의 현실과 관계없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만을 증거한다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은 오늘 이곳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는 오늘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병들고 상처 입은 자들을 치유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교회에 사람들이 모일 때에 교회는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본 연구자의 교회 사역들을 뒤돌아보면서 위의 내용들이 빈약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신학교에서 배운 일반적인 지식을 갖고 선교사역과 목회를 하였고 때때로 난관에 부딪히면 실망하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하였었다. 목회자가 바로 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목회자는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목표 없는 교회가 성장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일꾼들을 키워 함께 그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기도 운동도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성장시키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할 때에 교인들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간다. 기도할 때에 사단의 세력이 물려가고 사역에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제반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교회의 질적 및 영적 성장을 추구하게 될 때에 소그룹 사역은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1. 신학교 역사 및 현재사역 상황

본 절에서는 학교 상황에서의 소그룹 사역 및 학제화에 대한 필요를 간단히 다루고자 하는데, 먼저 본 연구자가 몸담고 사역하고 있는 KEMAN 선교부의 신학교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991년 11월 KEMAN 선교부는 수도 캄팔라와 엔테베 시 사이에 위치한 부에렝가(Bwerenga) 지역에 신학교 부지 20만평(160에이커)을 구입하였다. 이 부지는 넓은 빅토리아 호수 쪽으로 들어가 있어 작은 반도 모양의 땅에 위치하여 있다. 그 당시 부지는 숲으로 덮여 있었고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부지의 자연경관은 매우 아름다웠고 조용하였다. 모든민족 신학교(All Nations Theological College)는 이 부지에서 태동하였다.(당시의 신학교 이름은 All Nations Bible College로 시작하였다)

우간다 장로교회는 1979년 케파 셈팡기(Kefa Sempangi)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이디 아민(Idi Amin,1971-1979)이 집권하기 이전에는 한 오순절 교회의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이디 아민이 천주교와 기독교의 많은 성직자들을 핍박하고 살해하였기 때문에 그는 네덜란드로 도피하여 공부하였고, 그 후에 미국에도 가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디 아민이 퇴각한 후 그는 우간다에 입국하여 장로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지원으로 캄팔라 제일 장로교회당을 크게 건축할 수 있었다.

우간다 장로교단의 목사 선교사로 일하게 된 본 연구자는 우간다 장로교회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사역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우간다 장로교회는 작은 규모였기 때문에 목회자 양성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우간다 장로교회의 지도자들은 신학교 사역의 필요를 절감하여 본 연구자의 선교부에 신학교 사역을 함께 하자고 요청하게 되었다. 본 연구자는 아직 신학교 사역을 위한 준비가 덜 되어 있었지만 우간다 장로교단의 절실한 필요와 요청에 의하여 함께 신학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3년 1월 모든민족 신학교(All Nations Theological College)는 1년 3학기, 2년제 과정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당시에 우간다 교회 목사와 전도사로 사역하였던 17명이 신입생으로 들어와서 공부하게 되었다. 시작할 당시 학교에는 우간다 교수 3명, 미국 선교사 1명, 한국 선교사 2명의 교수들이 있었다. 1993년 한 해 동안은 나무란다 교회당을 강의실로 사용하였고 기숙사는 선교부 건물을 사용하였다. 같은 해에 신학교 부지(Bwerenga)에 학교 사역에 필요한 건물을 건축하였고 1994년부터는 신학교부지에 세워진 건물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1995년 1월에 11명의 졸업생이 배출 되었다. 첫 신입생 17명 중에 2명의 학생이 가정 사정과 유학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4명의 학생은 1학기나 2학기를 공부하지 않아서 졸업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1995년도부터는 3년제로 학제로 변경하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먼 지역에서 왔었기 때문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신학교의 수업은 목회자 양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하였다. 왜야하면 대부분 의 학생들이 교회 목회자로 소명을 받아 입학하여 공부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신학과 실천신학에 비중을 두었지만 조직신학과 교회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한 학기에 15학점 정도를 학생들이 공부하였다. 학기 중에 좋은 교수님을 한두 분 초청하여 집중 강의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학기가 시작되면 교수들이 돌아가며 매일 학생들과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가졌다.

우간다의 경제 활동과 교회들의 빈곤은 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부담을 안고 신학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모두 이런 형편의 학생들인데 누구에게만 장학금을 주어 공부하게 할 수 없었다. 성적 장학금도 있지만 일반 학생들도 공부 할 수 있도록, 학교 공부 후에 2-3시간 정도 일을 주어서 필요한 학비를 마련하게 하였다. 학생들의 학비가 학교운영에 절대 필요하지만 학교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 까지는 신학교 운영 지원비의 일부를 학생들의 근로 장학금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자신의 학비를 위해 여유 시간에 일을 하여서 학비를 내도록하여 자립심을 길러 주도록 하였다. 그런데 근래에 경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학생들이 학비의 일부를 내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앞으로 점차 비율을 높이려고 한다. 왜야하면 외부 지원비는 학교 시설과 운영에 사용되어야 학교가 더욱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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