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땅, 말리선교 16년 | biit | 2009-10-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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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땅, 말리선교 16년
(GMS 말리선교사) 안창호, 김희심 선교사
1. 아프리카 이슬람권 ‘학원선교’ 모델 창출 절대 빈곤 국가들이 몰려 있는 아프리카. 의료, 교육, 환경 등 어느 것 하나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이 없는 나라들이 아프리카에는 대부분이다. 그 중 불어를 사용하는 서북아프리카는 프랑스의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이슬람문화가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어 선교조차 쉽지 않은 곳으로 꼽힌다.
1994년 가족들과 함께 황폐한 사막의 땅 말리로 들어간 안창호선교사(합동GMS 파송). 일본을 가슴에 품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낯선 아프리카에 있었다. 92년 말리와 우리나라가 첫 수교를 맺은 후 3주간 찾아갔던 비전트립에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확인했다. 기니와 시에라리온, 말리로 이어지는 비전트립을 통해 ‘과연 이 땅이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의아해 하면서 ‘이 황폐한 땅에 하나님의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다짐을 안고 돌아왔다. 이미 마음은 아프리카를 향해 있었고, 눈에 남아 있는 아프리카 종족들의 모습은 쉽게 잊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히 시작된 말리 선교. 당시 말리에 거주하는 한인은 한 가족뿐이었고 우린 말리에 파송된 한국인 1호 선교사였다.
한국 선교사는 내가 1994년 들어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13년간 홀로 사역지에 있다가 14년차 되는 해에 평신도 사역자, 전문인 사역자가 태권도를 통해 사역하려고 한 가정이 들어왔고 이후 전도사님 내외가 또 들어와 함께 팀 사역을 하고 있다.
6개월 동안 지역문화를 익히고 말리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했다. 모든 선교사가 그렇듯이 나 역시 교회개척사역을 염두에 두고 출발했다. 하지만 현장의 상황에서 교회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미 이슬람은 그들의 문화였고 삶이었다.
무슬림이 종교가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방향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리의 문맹률은 90퍼센트 이상이다.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어린 세대를 변화시켜야 하며, 교육이 제일 좋은 매개체다.
어린 아이들에게 씨앗을 뿌려 복음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더디더라도 가장 좋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리에서의 학원 사역이 시작됐다.
말리는 1956년 프랑스 기본법에 의해 자치를 인정받고 세네갈과 함께 59년 말리 연방을 구성했으나 60년 말리 연방을 해체하고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사회주의 체제를 이어왔다. 91년 말리의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한국과 수교를 맺은 것은 92년이다. 선교학적으로 볼 때 말리는 10/40창에 속해있는 미전도종족이다. 이슬람이 90%가 넘는 말리에서 개신교 정착률은 0.7%에 불과하다. 국토의 80%가 사하라사막인 내륙국가이며 절대빈곤으로 최우선 접근이 필요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열악한 말리에서 홀로 시작한 사역! 이미 환경적 어려움을 감수하고 떠난 선교였다. 선교사들이 외부 환경으로 인해 가장 많이 받는 스트레스는 나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쉽게 극복됐다. 오히려 철저히 현지인들과 가까운 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폭염 속에서도 에어컨 없이 십수년을 버텼고 시원한 음료수 한 잔, 호텔 커피 한 잔 사먹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웃에게 미안해서”였다.
고뇌와 갈등으로 선교에 위기를 맞은 적도 있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이슬람권에 적응하는 것이 어려웠다. ‘내 생애 중요한 기간을 이들을 위해 보낼만 한 것인가’ 하나님께 반문하기도 했다. 그 때 하나님은 “말리 사람들을 위해 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말리인을 붙여 준 것”이라고 답해주셨다.
현지인이 변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기도 하지만, 진짜 우리들의 기쁨은 내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는 모습을 느낄 때며, 그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을 느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교라는 것이 다 어려움을 감수하고 가는 것이다. 환경적인 것은 어렵다고 느껴보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현지인과의 관계를 이뤄가는 것이었다. 우리와 너무 다르니까 그들의 문화 속에 들어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것이 어려웠다.” (김희심 사모) “현지인과 관계가 잘 형성돼야 복음도 전할 수 있다. 관계 형성하는 것이 참 지혜롭고 슬기롭게 해야 할 부분이다.”(안 선교사)
그 후 오직 ‘선교’에만 집중한 사역은 97년 유치원을 세우는 것으로 본격화됐다. 수도 바마코에 건물을 짓고 유치원을 시작했다. 문맹률이 90%에 이르는 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부에서 땅을 받아 지은 유치원은 지금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확장됐고 광명기독교학교라는 이름으로 첫 중학교 졸업생까지 배출했다.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전교생이 찬송을 부르고 수업 시작 전에는 성경을 읽는다. 전 교사가 모여 기도하고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은 별도의 기도회를 진행한다. 고등학교까지 설립하고 싶지만 현지 여건에서 사립 고등학교의 허가가 쉽지 않다. 감사한 것은 학교가 많이 알려져 앞 다퉈 입학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중학교 때는 1주간 동안 정규 수업을 하지 않고 수련회를 통해 복음을 제시한다. 수련회 기간에 복음을 제시해서 95퍼센트 정도가 예수를 영접하는 이슬람권에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됐다. 지금은 많은 사역을 현지인들에게 이양했고 교사, 교장 등도 현지인으로 세웠다.
“말리 아이들의 변화를 보며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또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는 때가 가장 보람이 있다. 우리에게 배운 거 생각나니?라고 기독교에 대해 물어보면, 안 잊고 있다고 말할 때 고맙고 감사하다. 현지인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알아줄 때 너무 감사하다.”(김희심 사모) “내 생명을 내 놓을 정도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 감사하다. 또 그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감사하다.”(안 선교사)
선교센터는 명문 사립학교로 자리 잡았다. 센터 안에 교회도 세워졌으니 첫 번째 목표도 더불어 달성된 것이다. 이슬람 가정에서 아이들을 미션스쿨로 보내는 이유는 일단 수업의 수준이 높고 학생들의 선호도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사학에 비해 학비는 가장 저렴하다. 모든 부모들이 탐내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번은 학교에서 진행하는 종교예식에 대해 교육청에 투서가 접수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교육청에서도 인정받고 있던 터라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사대주의 정책으로 인해 말리정부가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곳을 거쳐 간 아이들은 성품과 학업 성적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학부모들에게 두터운 신뢰가 쌓인 것이다.
광명기독교학교는 경건회를 이끌 만큼 실력있는 신앙적 교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큰 비전이다. 교사가 바로 설 때 아이들의 신앙적 미래도 계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원선교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아프리카 선교다.
이슬람 문화권은 복음의 가치관을 전하는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가치관을 심어주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가능성이 높은 사역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결실을 확인하고 있다.
광명기독교학교에 대한 바람이 있다면 아프리카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등 국제적인 교사들이 세워지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의 복음화를 통해 이들이 다시 침체된 유럽의 영성을 살리길 기도하고 있다. 한 곳에 머무는 복음이 아니라 길 따라 흘러가는 선교, 즉 하나님의 땅끝에서 완전해지는 선교를 꿈꾸고 있다.
2. 니제르강 프로젝트
현지인에게 운영을 맡긴 학교 사역을 뒤로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니제르강 프로젝트’다. 말리 인근을 가로지르는 니제르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 부족들은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로 북쪽으로 이동할수록 이슬람의 영향권은 더 강해진다.
일단 이곳은 사역자가 너무 없다. 1만8천 명 당 1명의 사역자가 존재하는 곳이 아프리카 불어권이다. 북아프리카 중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은 100퍼센트 이슬람권이며 그 밑에 걸쳐 있는 말리를 포함해 기니, 세네갈, 니제로는 90퍼센트 이슬람권이지만 선교가 가능한 나라이다.
100퍼센트 이슬람권에 비해서는 자유로운 복음을 제시하고 들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거기에 선교사가 많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른다.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들이 대거 남하하고 있다. 이 네 나라가 영적인 방어선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단기팀들과 함께 니제르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심성 고운 부족들에게서 가능성을 찾았다. 의료와 교육의 혜택이 맞물리면 복음전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후배들을 위해 먼저 와서 길을 닦고 있을 뿐이며 불어 및 이슬람권 아프리카 선교 현황을 한국교회에 알리기 위해 8월10일부터 13일까지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FM2414 선교축제‘를 개최했다. 이슬람의 남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말리를 비롯한 서아프리카의 복음화는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슬람권에서의 사역은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팀사역이 절대적이다. 지금까지의 일들은 모두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사역이다. 이제 땅끝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선교대회를 통해 아프리카 불어권 선교사들의 건강한 협력을 통해 국제적으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가장 힘들 때 찾아온 한 학부모는 “우리는 당신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이 나라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프리카는 나의 고향이요, 땅 끝이다. 복음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이 사역은 니제르 강변을 따라 계속 이어질 것이다.
3. 집회의 성과와 기도요청
말리선교 12년에 가장 서러움을 느꼈는데, 말리로 파송을 받고 프랑스에서 언어훈련을 마쳐 말리 입국 준비를 하던 고 허태준 선교사! 입국 한달전에 갑자기 필드가 바뀌어 옆나라로 비전을 가지고 기도응답으로 들어갔건만, 입국 5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일이, 하나님의 인도와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작년 초 명선교회 단기선교 사역팀의 청소년 수련회와 파리 뽕뇌프교회 단기선교팀(6명)의 사역이 아주 성과가 있는 집회였다. 이들의 팀사역을 보며 청소년 중심의 사역의 비전을 보게 되었다. 중학교 1,2학년(59명) 학생들의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처음으로 말리인들의 눈물을 보게 되었고, 나 또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말리 안의 어느 학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수련회를 가졌다.
이런 수련회가 정기적으로 1-2번이라도 갖을 수 있다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집회시 중간 중간 눈물을 훔치던 학생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서 아른거린다. 학교 정규 예배시간에도 중학생들의 예배가 종전과는 다른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수련회를 해달라며 제의를 했지만 시간적으로 쫓겨 할 수 없어 아쉽다.
기도해 주십시오. 학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컴퓨터가 꼭 필요합니다. 이제 곧 고등학교도 시작해야 하는데, 업그레이드된 교육 선교가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91년 3월26일 말리의 사회주의가 붕괴된 날, 많은 젊은이들이 피 흘림으로 이뤄 질 수 있었다.
이제 이슬람 개종을 위한 순교정신이 이 말리에서 일어나 이슬람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또한 이일에 저희들이 귀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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