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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리(New paradigm) Ⅱ : 창조 | 사영리 김명규 201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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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리(New paradigm) Ⅱ : 창조

 

1. 창조 (건강한/본래적 모습)

 

창조주 하나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인 인간이 되었다”(창2:7)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요4:24)이시기에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지와 만물,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신앙이 시작되며, 또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깊은 교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입니다. 바람과 공기, 전파 등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과 자외선 사이의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고, 인간의 귀는 20-20000Hz 사이의 가청 주파수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인간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빛이 비취는 것을 통해서 전기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뿐만 아니라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시14:1). 또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안에 있으며, 만물을 통해서도 그것이 분명히 나타난다고 합니다(롬1:19-20). 우리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전3:1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시42:1) 그래서 그 누구도 하나님이 없다거나 모른다고 핑계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롬1:21)

 

창조의 목적과 존재의 목적

하나님께서 우주(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하는 물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에 대해서 구상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기 전에 시상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축가는 건물을 짓기 전에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에 대해서 구상합니다. 건물을 짓다가 중간에 구상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역사 이전에 아름답고 위대한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깊이 구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어떻게 지으실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면 60억 인구 중에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쌍둥이라 할지라도 얼굴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은 역사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나를 예지예정하시고 때가 되어서 이 땅 가운데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이자 아버지이시며,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한 사랑 가운데 나를 지으시고 낳으셨습니다. 또한 천지 만물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답고 오묘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는 너무나 기이하고 놀라워서 그 깊은 비밀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인간은 감탄과 찬양을 연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고 싶은 간절한 갈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왜 지으셨나? 그리고 인간을 왜 지으셨고, 세상은 왜 지으셨는가?”하는 물음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컵을 예로 들면, 컵은 물을 담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컵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컵을 만드는 자가 컵을 만들기 전부터 결정한 것입니다. 컵을 만드는 자는 컵을 물을 마시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구상했고, 그 구상에 따라 컵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컵은 물을 담기에 좋고 마시기에 좋은 모양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컵이 물을 마시는 도구라는 사실은 컵을 만든 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자각과 발견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컵은 물을 마시는 도구로 사용될 때 그 가치value가 드러납니다. 접시로 물을 마시는 것은 어렵지만, 컵은 물을 마시기에 매우 적합합니다. 접시로 물을 마시다가 컵을 발견하면 너무나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컵의 가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가 사용되어질 때, 창조의 목적과 존재의 목적이 일치할 때 존재의 가치value가 드러납니다. 반면에 컵이 깨지면 창조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 목적도 상실되며 결국은 무가치한valueless 컵이 됩니다.

 

컵은 깨지면 물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지 않으면 무가치한 존재가 됩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때때로 짙은 공허와 허무에 빠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면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양한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있고, 또한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따라서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계를 예로 들면, 시계는 벽시계, 손목시계, 탁상시계 등 여러 종류의 시계가 있습니다. 이런 시계의 공통적인 목적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시계가 있지만, 시계를 시계 되게 하는 공통의 목적은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입니다. 이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버리면 장식물은 되겠지만, 시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공통적이며 궁극적인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자들도 많습니다.

 

바울은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라고 말했습니다. 컵은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규정할 수 없고, 자신이 그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인간도 스스로는 결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없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존재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 해답을 찾아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창1:28)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질문을 풀 수 있는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고 말합니다.(창1:26-27; 5:1,3; 9:6; 시8:6; 고전11:7; 엡4:24; 약3:9) 인간이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값진 보화를 넣어주신 것입니다.(고후4:7) 인간의 모습이 때로는 아주 작고 초라해보여도,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인체의 놀라운 신비로움이 점점 밝혀지고 있지만,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온전히 알지 못할 때, 인간의 존재 목적과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수고로운 과정을 통해서 창조하셨습니다. 6일 동안 계속된 창조의 결정체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을 향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이전에 5일 동안의 모든 천지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기 전에, 아이를 위해서 모든 물품을 미리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은 소중한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수고하셔서 창조하신 그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을 가치있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진정한 인간 존엄성의 회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리고 매우 오랜 시간 동안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은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라고 합니다. 예전에 로마의 동전에는 시저(황제)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겨져 있어야 동전으로써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간 안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주조되어 있고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을 때 인간은 존재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32세의 노총각이 친구들 몰래 결혼을 했는데, 그는 총각 때의 무절제한 방탕생활로 각종 성병을 앓아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결혼 2년이 지나서 갓난아기를 안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아이가 기관지를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병원에 간 진정한 이유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가서 아이가 자신의 증조부를 닮았다고 하고, 또한 자신을 닮은 모습도 있다고 했습니다. 엄지발가락 옆의 두 번째 발가락이 제일 긴 자신의 발가락을 아이가 그대로 닮았다는 것입니다. 발가락이라도 닮았다는 것, 그래서 그가 나의 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은 후에 반드시 자신과 닮은 모습을 아이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반드시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만약에 그 아이가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을 닮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 손과 발이 닳도록 수고하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희생하며 귀하게 키워냅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 안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만을 보십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허물과 죄가 있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 안에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구겨져도 돈이며, 그 가치가 조금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돈에 새겨진 형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돈으로써의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심각하게 타락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잃어버린 자녀를 애타게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아를 발견해야 자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아 발견이 없으면 자아 실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지어졌다는 창조 신앙이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깨달아질 때 우리가 새로운 발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 발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자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사랑으로 낳으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 명 한 명이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 안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닮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자이신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고, 결코 하나님과 같을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유한하고 연약한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독한 무지이며 교만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시며, 그것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동안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신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근본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이 빗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말해왔지만, 조금씩 본질에서 빗나가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도 희미해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요일4:8) 이것이 사도 요한의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할 수 있는 성품과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인간을 사랑하라”는 두 강령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사랑의 법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사랑의 법도를 따라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전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의 완성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의 완성자이셨던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또한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사랑의 사람이 되는 사랑의 시대를 우리가 열어가야 합니다. 인간이 뒤로 걷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걷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즉 사랑의 법을 따라서 순리대로 살아갈 때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쁨]입니다.

 

1)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일 처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 말씀만큼 중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알고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육하라는 말은 영어로 [be fruitful]이며, [열매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하셨습니다.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완성은 무엇입니까? 기어 다니다가 두 발로 다니는 것이 완성입니까? 건강한 신체를 가지는 것이 완성입니까? 근사한 외모를 가지는 것이 완성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완성입니까? 지식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이 완성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완성은 인간이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 안에서 온전히 교제하며 일치와 연합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은 사랑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아래 있을 때만이 안전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만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의 생육(온전함)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에로스eros가 아니라 아가페agape입니다. 그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에 있어서도 가장 극상품의 사랑의 열매를 맺기 원하시고, 그 가운데서 번성의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의 씨앗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룬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 즉 생육한 자들이 번성해서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 자립할 수 없고,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포도나무와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용지물입니다. 또한 포도나무는 가지가 없으면 열매가 맺혀질 수 없습니다. 열매는 가지의 끝에 맺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며, 주님께서도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포도나무와 하나 되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될 때,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과 교제 속으로 들어갈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리고 진정한 완성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보호 아래서만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충분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으며, 성장한다 해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음으로 사랑을 알 수 있고, 또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의 결핍으로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사랑의 열매가 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통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부 관계가 지탱되기 위해서는 사랑 이전에 서로를 향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관계가 균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불신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미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미움은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괴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하게 사랑을 사랑으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도 믿음의 관계가 되지 않으면 서로 간에 사랑이 흐를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향한 믿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사랑은 충만한 기쁨이라는 열매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관계 아래서 철저하게 [연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온전한 사랑의 관계 아래서 [일치]되어 사랑과 사랑이 흐르는 모습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생육된 존재로 짓지 않으셨을까요? 생육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화가가 용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에 용의 눈이 없었습니다. 화가는 용의 눈을 그리면 그림이 진짜 살아있는 용으로 변해서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못하자 용의 눈에 점을 찍었는데 정말로 용이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마지막 마침점을 찍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에 응답할 때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진정한 창조의 이상이 실현되며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마침점을 찍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의 마지막을 인간이 장식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창조하셨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강제적으로 사랑하도록 하실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결코 다른 이에게 강제로 요구할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인격적으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인간은 로봇이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강제력을 가진 주종의 관계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힘과 강제력이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와 사랑 안에서의 존중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본인의 자유에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가슴 시리고 눈물겨운 희생적인 사랑을 알게 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죄를 짓거나 방종에 빠져서 타락의 길로 빠지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뜻과 이상을 온전히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온전한 자유 위에서 진정한 사랑은 꽃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를 통해서 생육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생육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해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직적인vertical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가장 먼저 수직적인 기초가 온전히 세워져야 합니다. 척추가 온전해야 몸이 바로 설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공부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해처럼 빛이 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신발을 정리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려고 하고 섬기고 희생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행위의 동기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친해지려고 해서 친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군중 속에서도 사람들은 고독을 느낍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 같지만 뿌리 깊은 불신과 오해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은 서로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때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있을 때 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와 아픔만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일 전화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하고 살아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불통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왜 전화가 안 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서로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화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전화국을 통해서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통화가 안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서로를 향해서 통화불능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오늘의 세상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지옥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서로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고통스러운 상황이 초래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모든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번성하라는 것은 사랑의 번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평적인horizontal 것입니다. 식물은 열매 안에 있는 씨로 번식되지만 사람은 사랑으로 번식됩니다.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랑은 반드시 열매, 즉 생명을 낳습니다. 죄를 사랑하면 죄의 열매를, 의를 사랑하면 의의 열매를 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있다면 자녀가 열매입니다. 부모가 나무라면 자녀는 그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즉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의 나무에서 인간이라는 열매가 맺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등종교는 독신주의를 매우 거룩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으로 인해서 세상과 사람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열매들이 너무나 많이 맺혀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오늘날 잘못된 번성의 역사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사귀고 모든 인간 관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담(남자)와 하와(여자)가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너무나 다른 존재입니다. 어떤 책에서는 남자는 화성에서, 여자는 금성에서 태어난 존재와 같다고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 안에서 깊어지지 못할 때 결혼은 서로의 차이로 인한 갈등으로 인해서 인생의 무덤이 되고 맙니다. 남자와 여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생육해야 하며,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혼해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생명을 낳으며, 위대한 에덴의 번성과 충만의 역사를 열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육과 번성의 역사가 계속될 때 온 세상 가운데 충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을 통해서만 아름답게 열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만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복이나 지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사랑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그리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만이 천국(에덴)을 다스릴 자격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는 천국의 주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다스리라”하신 말씀 안에 담긴 세계를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원하셨던 아름다운 창조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이룰 책임이 인간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 앞에서, 또한 자연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리해서 나타내야 할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인간은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랑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안에서 가장 온전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2)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진정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20: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견딜 수 없는 질투를 느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은 후에 자녀에게 사랑을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깊고도 아름다운 교제를 원한다고 문제 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으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부모에게 더 깊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필요하고, 자녀는 또한 부모의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사랑을 원하시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은 인간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될 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살인, 간음, 도둑질과 도덕적 타락과 다양한 양상의 죄의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사람들을 반신론에 빠져들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반신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4:10)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될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에서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생명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깊은 세계를 묵상해야 합니다.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과 경배를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인간을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자는 영혼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인간은 형제를 사랑하며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새겨주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사랑을 실천해본 자는, 그래서 진정한 기쁨을 체험해본 자는 사랑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종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불쌍한 형제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아니하고 함께 그들의 아픔과 신음을 공유하며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께서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하셨습니다. 부모는 형제가 서로 우의 좋게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아는 자들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형제를 향한 [섬김]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섬김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섬기지 않고 항상 섬김 받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가장 위엄있고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항상 형제를 위해서 스스로 종이 되는 자,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형제들을 위해서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섬김을 배우기를 원하셨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친히 그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은 형제를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것이며, 자신을 통해 형제가 행복하고 기쁠 수 있도록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마음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

인간의 최고 창작품은 아기입니다. 산부인과의 전화는 새롭게 태어난 생명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사람들로 인해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화 통화가 가장 많은 곳이 산부인과라고 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항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다줍니다. 생명 그 자체가 너무나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랑의 창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수고로운 희생의 6일 창조 역사가 끝난 후에 너무나 조화로운 생명의 결정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1:31)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마르거나 쇠하지 않는 온전한 기쁨과 만족이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은 존재만으로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더 큰 기쁨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면 본인이 가장 기쁩니다. 우리가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살아갈 때 에덴의 이상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가운데서 충만한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랑으로 지어진 생명과의 교제를 통해서 더 깊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은 것 자체로 기쁘지만, 그 아이와의 사랑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스스로 낮춥니다. 때로는 아이가 웃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어릿광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먼저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얻는 기쁨을 조이joy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섬기며 십자가를 질 때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 신락神樂입니다. 사랑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진정한 기쁨을 낳습니다. 이것은 또한 영원성을 보장합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기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후회와 한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인간에게 자기만족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을 쾌락, 플레져pleasure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매우 순간적이며, 이후에 더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비정상적인 중독과 죄책감을 가져다줍니다. 사람이 마약을 먹으면서 체험할 수 있는 순간적인 쾌락pleasure이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모든 자극적인 약물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점점 더 강렬한 쾌락을 찾도록 만들고, 그것에 철저하게 중독시켜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결국은 철저한 파멸로 이끌고 갑니다.

 

인간이 폭력을 행하거나 자극적인 오락을 하는 것을 통해서도 순간적인 쾌락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공연장에 가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는 것도 순간적으로는 쾌락을 맛보게 해줍니다. 인간은 때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벗어나는 행위들, 즉 죄와 불의를 행하는 가운데서도 짜릿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결국은 본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느낄 때 진정으로 기쁩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임을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서 살 때 기쁩니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 가치로운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우신 뜻 안에서 구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세속적인 방법으로, 죄를 지으며 일탈하거나 자기만족적인 방법들을 통해서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길을 통해서만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희생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또한 기쁨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과 대속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인간이 서로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도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세상은 이 질서를 따라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합목적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개체에 대해서 희생적이며 이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 창조의 질서를 깬 개체는 반드시 도태되거나 멸종당하게 됩니다.

 

사랑의 최고 경지는 [희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24:13-16)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았습니다.](눅24:30-31) 떡을 뗀다는 것은 영어로 breaking bread입니다. 떡은 찢어져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떡은 찢어져서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생명을 줍니다. 떡의 찢어짐은 희생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동행하셨으나 보지 못했던 주님을 눈 떠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소유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내어주신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고 하시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희생, 이것보다 큰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3-14)고 하셨습니다. 희생을 통해서만 번성의 길이 열릴 수 있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곁에 있을 때는 부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지만 부모님이 없으면 부모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공기가 있을 때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지만, 공기가 희박해지거나 오염되면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돈을 물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만큼 물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물이 오염되고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더 보이지 않는 사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찢어지심으로 인해서 배부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한 구체적인 희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말씀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공부를 위해서 시간을 희생하지 않는 자는 말씀을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기도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수반됩니다. 아낌없이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비우고 희생할 수 있습니까? 그것만큼 우리는 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위해서 지어졌고, 하와는 아담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이 둘은 서로의 희생을 통해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실 때 이미 여자를 전제하고 만드신 것입니다. 또한 식물은 동물을 위해서, 동물은 식물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고, 자연계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공급합니다. 동물은 산소를 흡수하고 이산화탄소를 식물에게 공급합니다. 또한 죽어서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거름이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각각의 개체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물은 모두 서로의 희생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법을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고, 이 사랑의 법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과 세상을 유지 보전할 수 있으며, 또한 더욱더 풍성한 생명의 동산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극치가 희생이라면, 희생의 극치는 [대속]입니다. 의인을 위한 희생이 있고, 친구를 위한 희생이 있지만, 대속은 악인과 원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의 죄를 나의 것으로 삼고 대신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속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고 말했습니다.

 

대속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짐을 내가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연약함을 내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해서 다른 집의 유리창을 깼는데, 그것을 어머니가 대신 갚아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대속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원론을 통해서 이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더욱 깊이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철저하게 자신이 지고 가는 대속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요14:9)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향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는 철학이나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삶이요 희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말씀대로 철저한 희생의 삶을 살아가셨고, 그 희생으로 인한 생명의 결실로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관념적이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리고 난무하는 구호와 같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삶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 영혼을 적셨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희생의 삶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는 것인데,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사랑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한 높임과 섬김을 받으셔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셨지만 스스로 가장 낮고 험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온전히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대속의 길, 섬김의 길, 희생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은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자기 비움은 헬라어로 케노시스kenosys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소유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기 낮춤, 이것은 겸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이 모습을 닮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기에 힘쓰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기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장 온전하게 나타내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생육된 참 인간의 모범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모범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시는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기록된 율법과 예언의 말씀을 온전히 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구약을 인용하며 “기록된 바 …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형식의 말을 수차례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기록된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그것을 얼마나 가슴에 새기고 사셨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지 아니하고 외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신앙하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역하고 거스리며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시69:9)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요2:17)

 

또한 예수님은 바쁜 사역의 와중에서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막1:35), 항상 쉬지 않고 하나님과 기도 가운데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호흡하시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는 것을 끊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역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보다 우선한 것이었으며 또한 사역의 원동력이었고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고 온전하게 알아가셨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셨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예수님은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도 온전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3:14-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으로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섬기시기 위해서 소중한 몸을 찢으셨고, 물과 피를 아낌없이 쏟으시며(요19:34)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온전히 형제를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양식 삼아 사셨고,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삶에서만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또한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해서 힘쓰셨습니다.

 

그리고 고귀한 생을 마감하시며 “다 이루었다”(요19:30)고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원하셨던 사랑의 법을 온전히 성취하신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세계를 다시금 찾아서 회복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조 본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전히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져야 할 사랑으로 가득한 인격과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증거해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 보라come and see”(요1:39)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Follow me”(마4:19; 마8:22; 마9:9; 마19:21; 막2:14; 막10:21; 눅5:27; 눅9:59; 눅18:22; 요1:43; 요12:26; 요21:19)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은 진정한 기쁨과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의 끝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 : 평화사상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대역사를 이루신 후에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창1:29-30)고 하셨고, 결론적으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태초의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식물이 되리라. 식물로 주노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타난 평화 사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의 이상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서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면 이 땅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세계가 열려졌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조금의 눈물과 피 흘림이 없는 온전한 천국의 이상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온전히 생육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따라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식물로 주노라”고 하신 평화의 이상을 깨달은 자들만이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회복된 메시야 왕국,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사11:7)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식물로 주노라”하셨던 에덴의 이상이 다시금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6)고 했습니다. 회복된 하나님 나라는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사11:9)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사11:9)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서를 마치기 전에 다시 한 번 메시야 왕국에 대해서 예언하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3)고 합니다. 이런 세계를 우리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고 했습니다. 메시야 왕국에서는 공격적인 자도, 뱀처럼 남을 무는 자도, 곰처럼 미련한 자도, 어린아이 같이 약한 자도 서로 서로 기대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또한 사랑의 사람들로만 가득하기 때문에 서로를 해치거나 상하지 않게 하며 위로와 대속의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감싸고,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사슴처럼 기대고 살아가는 세계,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정치나 경제, 사회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따라서 살아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이런 아름다운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생명이 충만한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에덴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두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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